그리스도인의 성장과 성숙

1. 말씀을 경청: 기독교의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있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말씀을 듣는 데서 발생하게 된다. 열린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진리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성령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2. 창조주 확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천지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믿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시작이요 모든 진리의 기초가 된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발견하고 만유의 주권을 인식하게 된다.

3. 자신의 발견: 원죄에 대한 이해를 하게 되면서 죄에 빠진 자신을 재발견 하게 된다. 죄에 대한 인식은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하다. 성령은 죄와 의에 대하여, 그리고 심판에 대하여 알게 하신다.

4. 구세주 신앙: 성경은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성이 충만한 책이다. 성부와 성령께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적으로 알게 하신다.

5. 세례와 중생: 세례는 옛 사람의 장사를 의미하고 중생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 그리스도의 생명에 연합되어 살아가는 삶의 시작이다. 이러한 역사는 성령의 역사로서만 가능하다.

6. 인격적 영접: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를 인식한 사람이 인격적으로 주님을 영접하여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은 성령의 역사하심으로써만 가능하다.

7. 사죄의 확신: 은혜 중에 은혜는 속죄의 은혜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공의는 만족되었고 십자에서 자신의 죄가 처리된 것을 믿게 되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다.

8. 믿음과 회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와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이며 성령의 역사로서만 가능하다. 믿음과 회개 역시 힘쓰고 애써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9. 구원의 확신: 중생과 믿음과 회개는 사실상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중생을 한 사람이 믿음을 갖게 되고 믿는 자가 회개하게 된다. 억지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로 믿음이 생기고 자라게 된다.

10. 영원한 헌신: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고 죄에 빠진 자신을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것을 알게 된 성도는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는데 단번에 영원히 전체로 드리는 헌신이다.

11. 시련과 시험: 하나님께서는 헌신된 사람들을 시련과 시련을 통과하게 하신다. 이는 강하게 하시며 순수하게 하게 하시는 과정으로 역시 성령에 끌리어 시련과 시험을 받게 된다.

12. 사명의 인식: 헌신하여 시련과 시험을 거쳐서 순수해진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을 보게 하신다. 참되게 헌신한 사람은 자신의 일을 보고 사모하게 된다. 자신의 삶을 바쳐서 해야 할 일을 보게 되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다.

13. 임직과 책임: 사명에 대한 인식이 분명한 사람들에게 자원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직분이 주어지게 되고 그 사람은 책임감을 가지고 그 일을 하게 된다.

14. 성령의 충만: 성령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이 자신의 사명과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충만케 하신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것이 성령의 충만함의 결과이다.

15. 진심과 진력: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게 되고 전심 전력하여 진보가 모든 사람 앞에서 나타나게 된다.

16. 기도와 간구: 성령 안에서 무시로 기도하면서 간구하게 되는 것은 맡은 직분과 사명을 잘 감당하게 위해서이며 이렇게 기도할 때 성령께도 우리의 기도를 도우시며 예수님께서도 중보 하신다.

17. 은사와 봉사: 모든 은사는 교회를 잘 봉사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은사는 개인을 통하여 나타나지만 교회를 위하여 주어진 것이다. 은사는 그 사람의 사명과 직분과 적성에 맞게 주어진다.

18. 온유와 겸손: 은사를 받은 사람들의 기본 자세는 온유와 겸손이다. 모든 은사와 능력은 하나님의 교회를 풍성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개인의 명예나 교만의 재료가 되어서는 안 된다.

19. 계명과 충성: 우리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다 해도 계명을 따라서 충성하지 않으면 은사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항상 주의할 것은 계명을 떠나지 않고 율례와 계명과 법도를 따르는 것이다.

20. 인애와 사랑: 하나님의 계명은 사랑이다. 친절과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최고 윤리요 모든 계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온갖 은사와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 능력과 은사를 계명을 따라서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

21. 인내와 성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인내하면서 이루어가는 성화는 일생동안 진행된다. 그러나 이 땅에서는 완전한 성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부활의 날에 가서야 온전한 성화가 이루어진다.

22. 부활과 영화: 그리스도인의 구원이 완성되는 마지막 단계이다. 주님의 재림과 함께 주 안에서 잠든 육체는 부활하게 되고 살아 있던 사람들은 홀연히 순식간에 거룩하게 변화 되어 영화로운 몸을 입게 된다.

23. 칭찬과 상급: 주님께서 오시면 계명을 따라 맡은 일에 죽도록 중성한 종들에게 칭찬과 상급이 있다. 그 때까지 그리스도인들은 근신하며 깨어 있어야 한다. 사람들의 찬사나 비난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24. 영생과 복락: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영생과 복락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약속된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리스도인들의 최후, 최종의 궁극적 소망이다.

사순절(四旬節, Lent)에 즈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심장이며 핵심이다.
성금요일과 부활절은 기독교인의 신앙 달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축제의 날들이다.
사순절은 준비와 참회의 기간으로 이 기간에 우리는 성금요일과 부활절을 갈망하며 기다린다.

사순절(四旬節)은 문자 그대로 ‘사십 일 기간’이라는 뜻이다.
사십 일을 따로 떼어 놓아 특별한 절기로 지키게 된 것은 대략 주후 3~4세기경으로 올라간다.
40이라는 숫자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중요한 숫자로,
사순절의 40이라는 숫자는 특별히 구약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인들이 출애굽 후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것과,
새로운 이스라엘인으로 오신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 유대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며 준비하신 일에 기반을 두고 있다.
덧붙여 설명하자면, 애굽 왕 바로의 폭정에서 시달리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웨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위대한 능력으로 구원을 받아 출애굽하였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40년 동안 광야에서 신앙의 훈련을 받게 된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창조의 주님),
억압과 폭력과 고역의 쇠사슬에서 구원하신 전능하신 하나님(구원의 주님)께만
영광과 찬양과 충성과 신뢰를 바치며 살아가는 과정이 광야의 삶이었다.
그들은 광야의 학교 40년 동안 단 한 가지 과목을 이수하도록 등록한 신앙의 학생들이었다.
과목 명칭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였다.
광야로 대표되는 죽음의 영토에서 그들은 생명의 공급과 유지 장치가 어디로부터 오는지를 배워야 했다.

광야 시절은 풀 한 포기 생존하기 힘든 극한 환경에서
200만 명이 넘는 출애굽의 생명들이 살아남는 길이 무엇인지 온 몸으로 배워야만 했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훗날 광야 생활이 마칠 즈음에 광야 학교의 유일한 과목명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한 대답이 나왔다.

광야 생활의 목적을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하고 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으로 사는 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었다.”(신명기 8:3)
우리가 이제는 다 알게 되었지만 옛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광야의 학교의 유일한 과목에서 다 낙제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치룬 것은
바로 옛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실패한 시험을 그대로 다시 치르신 것이다.
40일을 굶주리신 예수께 사탄은 광야의 돌들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유혹하였다.
예수의 대답은 바로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 그대로였다.

예수님의 광야 40일 체험은 옛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광야 40년 체험의 축소형 재생이었으며,
여기서 예수는 ‘새로운 이스라엘'(New Israel),
‘참 이스라엘인'(True Israelite)으로 나타나게 되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제자들이기를 추구하는 크리스천들은 그분과 함께 이 사순절에 광야 체험을 연습해야 할 것이다.
체험 연습의 중심부에는 항상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는 일이다.
재물이나 권력이나 연고와 같은 것들이 우리의 삶을 참된 삶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고백이 드려지는 절기가 사순절이다.

사십 일의 기간은 성회(聖灰) 수요일(2014년은 3월 5일)로부터 시작하여
수난주간(2014년은 4월 14~19일)까지 계속되는데

그 가운데 들어 있는 일요일(주일)들은 숫자에 포함하지 않는다.
일요일은 기쁨과 즐거움의 예배를 위해 따로 떼어 놓은 날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은 사순절 기간의 주일에는 ‘참회'(repentance)와 ‘갱신'(renewal)에 초점을 맞추어 예배를 드린다.

우리 안에 있는 죄성(罪性)을 죽이고, 새롭게 되는 일에 집중하는 기간이 사순절이다.
전자가 고통을 수반하는 회개(mortification)를 가리킨다면
후자는 성령을 통한 새 생명(新生)의 기쁨을 회복(vivification)하는 것을 말한다.
참고로, 가슴을 치며 회개하는 길로 안내하는 성경 본문으로서는
시편 50장; 이사야 1장; 요엘 2:12~17; 마태 6:1~6, 16~21이 있다.
또한 기독교 전통에 일곱 편의 참회 시라는 것도 있다(시편 6, 32, 38, 51, 102, 130, 143).

기독교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사순절은 부활절 주일에 세례를 받을 사람을 위해 신앙을 교육시키고
그들이 그 날에 온 회중 앞에서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도록 준비시키는 기간이었다.
교회에서 멀어졌던 사람들을 다시 불러들이고,
각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 경건 생활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갖고 노력을 기울이도록 하며(예 : 기도 생활, 성경 읽기, 구제하는 일),
구세주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마음속 깊이 새기도록 준비시키는 절기였다.

이처럼 사순절의 일차적 초점은 ‘세례전적 영성'(baptismal spirituality)을 탐구하고 함양하여 그 영성을 깊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묵상하는 일에만 무게를 두는 것은 아니다.
이 영성의 중심부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이 있다.
세례의 참된 의미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우리의 옛 자아는 죽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이다.

이것이 세례전적인 영성이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아마 이에 대한 고전적인 구절로서 복음성가로도 잘 알려진 말씀이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개인적으로 사순절을 지키는 다양한 방식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사순절에 무엇인가를 ‘포기’한다.
어떤 사람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구제하는 일에 힘을 쏟는다.
또 다른 사람들은 특정한 성경이나 본문에 초점을 맞추어 공부하기도 하고
아니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로 걸어가는 여정에 도움이 될 만한 경건 서적을 읽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순절에 어떤 종류의 설교를 기대하는 것이 좋을까?
아마 크리스천의 생활과 삶의 방식 혹은 기독교인들의 덕목과 핵심 가치들에 대해 배우는 기간이면 좋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주제를 깊이 탐구하고 묵상하며 삶 속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회개’, ‘겸손’, ‘금식’, ‘기도’, ‘경건’, ‘자기 훈련’, ‘신실함’.
아니면 갈라디아서 5장에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에게 말씀하신 성령의 열매들도 적절한 주제들이다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자비’, ‘착함’, ‘성실’, ‘온유’, ‘절제’).
겹치기는 하겠지만 청년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크리스천의 삶을 위한 핵심적 가치들을 묵상하도록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사순절의 전통적인 색상은 ‘자주색'(purple)이다.
어떤 교회는 사순절과 부활절 기간(부활절 기간이란 부활주일부터 승천일까지, 혹은 오순절이나 성삼위일체 주일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을 대조시킨다.
이런 입장을 취하는 경우 사순절 기간에는 보통 ‘알렐루아'(Alleluia)를 노래하지 않는다.
즉, 하나님을 찬양하는 찬송을 부르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서 알렐루야를 부르지 않는 이야기 하나를 들어 보자. 일명 ‘알렐루야 숨기기'(Hiding the Alleluia)다.

‘알렐루야 숨기기’라면 매우 이상하고 흥미로운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사순절을 의미 있게 지키기 위해 미국의 한 개혁 교회의 어느 주일학교 선생님이 내신 독특한 아이디어였다.
먼저 카드 위에 ‘알렐루야’라는 글자를 크게 써 넣는다.
그리고 그 카드를 사순절 기간 동안 아무도 보지 못하게 싸서 감추어 놓는다.
부활절 주일이 오기까지 아무도 입 밖에 ‘알렐루야’라는 단어를 내뱉거나 말하거나 노래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찬송가 중 ‘슬픔의 사람'(Man of Sorrows)이라는 찬송을 사순절 기간 동안 반복해서 부르게 한다.
주일학교 어린이들은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둘러보면서 ‘슬픔의 사람’을 노래한다.
그러다가 그 찬송 가사 가운데 ‘알렐루야’가 나오면 입술을 굳게 다물고
‘음-음-음~~~’하다가 그 다음 가사인 ‘놀라운 구세주!'(what a Savior!)라고 부르게 된다.

사순절 기간 동안 주일학교 어린이 예배 시간에 아이들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즉, 예수께서 그의 공생애에 마지막 유월절을 지키시기 위해
그의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旅程)에 어린아이들도 동행하는 것이다.
사순절에 강단 앞에 커다란 십자가를 세워 놓는다.
거친 막대기로 만든 십자가다.

그리고 허수아비에 헐거운 옷을 입히듯이 그렇게 십자가의 펼쳐진 양 팔에 헐거운 천을 걸쳐 놓는다.
사순절의 첫 주일에 주일학교 선생님은 알렐루야를 적은 카드를 강단 앞에 세워져 있는 십자가 위에 걸쳐진 넓은 천 속에 숨긴다.
이렇게 해서 아무도 사순절 기간에 그 ‘알렐루야’를 보지도 말하지도 노래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예수께서 부활절 아침에 우리가 ‘알렐루야’라고 노래하고 찬송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분이 십자가에서 값을 치른 사실을 회상하고 기억하는 길이다.
예수께서 죽으시기 전,
지상에서의 예수님의 마지막 날들에 관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는 어린아이들에게 ‘알렐루야’가 눈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알렐루야는 완전히 없어지거나 사라진 것이 아니다.
잠시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인 것뿐이었지 실제로는 그들 가까이, 그들의 손이 미치는 곳에 있었다.
아마 우리들 대부분이 야웨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삶이 어떨 것인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둡고 캄캄함이 엄습하여 오는 삶, 한 치 앞길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득한 순간들 말이다.

그러나 어둔 계절 동안, 북풍과 한설이 몰아치는 혹한 속에서,
그래서 ‘알렐루야’라고 소리도 낼 수 없고 노래를 부를 수 없는 때에라도,
알렐루야가 우리의 눈앞에서 숨겨져 있고 감추어져 있을 때에라도,
그 ‘알렐루야’는 결코 우리로부터 멀리 있지는 않다.
손자를 잃은 고통, 신장결석으로 인한 통증,
그렇게도 믿었던 사람에 의한 배반의 고통-
이런 것들이 우리의 입에서 찬양(알렐루야)들을 소리 내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어두운 힌트’일 뿐이다.
왜냐하면 ‘알렐루야’의 끝마디인 ‘야'(Yah=야웨)는 항상 우리와 함께,
때론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때에라도,
우리와 함께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다.

류호준 / 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장

*이 글은 ‘류호준 교수의 무지개 성서 교실’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나는 아직도 헤아릴 수 없다

나의 고향은 경남 산청이다.

지금도 비교적 가난한 곳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정형편도 안되고

머리도 안되는 나를 대구로 유학을 보냈다.

대구중학을 다녔는데 공부가 하기 싫었다.

1학년 8반, 석차는 68/68, 즉 꼴찌를 했다.

부끄러운 성적표를 가지고 고향에 가는 어린 마음에도 그 성적을 내밀 자신이 없었다.

당신이 교육을 받지 못한 그 한을 자식을 통해 풀고자 했는데, 꼴찌라니…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하는 소작농을 하면서도

아들을 중학교에 보낼 생각을 한 아버지를 떠올리면

그냥 그 성적표를 보여 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록된 성적표를 정교하게 손을 보아

근사하게 1/68로 고쳐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아버지는 보통학교도 다니지 않았으므로

내가 1등으로 고친 성적표를 알아차리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대구로 유학한 아들이 집으로 왔으니

친지들이 몰려와 “찬석이는 공부를 잘 했더냐”고 물었다.

아버지는,

“앞으로 봐야제.. 이번에는 어쩌다 1등을 했는가 배..”했다.

“명순(아버지)이는 자식 하나는 잘 뒀어.

1등을 했으면 책거리를 해야제” 했다.

당시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살림이었다.

이튿날 강에서 멱을 감고 돌아오니, 아버지는 한 마리뿐인 돼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잔치를 하고 있었다.

그 돼지는 우리집 재산목록 1호였다.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부지…” 하고 불렀지만 다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그 뒤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난 나는 강으로 가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에

물속에서 숨을 안 쉬고 버티기도 했고, 주먹으로 내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다.

충격적인 그 사건 이후 나는 달라졌다.

항상 그 일이 머리에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7 년 후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아들이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러니까 내 나이 45세가 되던 어느 날,

부모님 앞에 33년 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어무이.., 저 중학교 1학년 때 1등은 요…” 하고 말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옆에서 담배를 피우시던 아버지께서

” 알고 있었다. 그만 해라.

민우(손자)가 듣는다.” 고 하셨다.

자식의 위조한 성적을 알고도, 재산목록 1호인 돼지를 잡아 잔치를 하신 부모님 마음을,

교수이고 박사이고 대학 총장인 나는, 아직도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 전 경북대 총장 박찬석 –

영혼이 지음 받은 목적

땅의 풍요로써 영혼을 결코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모든 만족과 충족은 편리와 편리의 결합에서 오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큰 재산을 소유하고 있지 못해 그의 마음이 거기에 적응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는 만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큰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그의 마음이 거기에 적응하고 있다면

그는 만족할 것입니다.

땅의 풍요와 인간의 더 나은 부분,

즉 영혼 사이에는 이 적합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존재할까?

물건은 그 물건이 만들어진 원래의 목적으로 가득 찰 때,

비로소 가득 차 있다고 말해질 수 있습니다.

상자나 트렁크는 비어 있을 때 공기로 가득차 있지만,

공기를 가득 채우기 위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또한 교회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본당은 걸상이나 공기로 가득 차 있지만, 우리는 교회가 비어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교회가 만들어진 목적으로 …..

그리스도와 성도들로 가득 차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땅의 모든 풍요를 누리고 잇는 사람을 생각해 보면…..

그의 영혼은 땅의 풍요를 위해 지음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공허한 존재로 말해질 것입니다.

모든 것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허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은 그가 지음받은 원래의 목적에 합당한 것으로

즉 그리스도로 채워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